포기라는 이름아래 희생되는
나의 ‘작가’라는 꿈
원래 그랬다. 나는 애초에 작가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성적과 환경, 한때의 욕심으로 작가라는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제품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단지 입시를 하기 위한 도구로써 미술을 했을 뿐이었다.
컴퓨터 끄적이고, 음악듣고 하는게 인생의 전부였고 유일한 낙이었던 나에게 스포츠나 연예계 소식, 금융소식 이런 모든 사회정보는 문외한이나 다름 없었다. 여행이나 외식조차 해본적도 없기 때문에 그 흔한 ‘스키’조차도 한번 안타봤으니 말이다. 아무 세상물정 모르는 나에게 참 야속하게도 응원하거나 도움을 주는 사람보다는, ‘니가 할 줄 아는게 뭐냐?’따위의 무시들이 돌아오는게 많았다. 특히 군대로부터 이상하게 전해진 ‘계급사회의 남성성’은 나에게 끊임 없는 열등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던 중 2007년 여름. 대학교에서 가는 유럽 전시투어 신청서를 받아보며, ‘이번 아니면 언제 내가 유럽을 갈 수 있을까?’ 그래서 그렇게도 가장 인생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엄마의 등골을 휘게 만들고 유럽을 가는 것으로, 조금은 인생에 경험을 하나 추가해보는 것으로 나의 욕심을 채워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보는 대형 설치 작품들, 미디어 아트, 현대미술이란 이름아래 난해한 다양한 작품들과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한국에서 평생 살며 본적 없는 특이한 광경들. 그런 요상한 분위기가 나를 이 길로 이끌었다. 뭔가 ‘대단하게’, ‘보여주기 위해’라는 예술활동의 동기를 얻으며 여행은 막을 내렸다.
참 그 여행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전과’를 생각하거나, ‘자퇴’를 생각하던 내가 ‘미술 작가’라는 것에 가슴이 흥분되기 시작했다.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그 스토리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나간다는 것. 그 것이 얼마나 짜릿하고 흥분됐는지 모른다.
많은 친구들이 놀고, 여행다닐 대학교 1, 2학년 방학은 나의 천국이었다. 학교에서 난방과 냉방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혼자 작업실을 쓰듯 큰 캔버스들을 펼쳐놓고 마음대로 그림을 그렸다. 비록 돈도 없고 초라한 나였지만 그림하나 그린다는 것이 인생의 큰 축복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1학년 때부터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열등감은 ‘그림그리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해소가 된다는 것을 느꼈을때, ‘아 나는 그림을 그려야 살겠구나’ 처음 깨달았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집안의 재정과 환경이 급격하게 너무나 안좋았고, 마침 때가 되어 군대를 다녀왔다. 2년이란 시간은 금새 지나갔다. 참 재밌기도 했고, 나가서 어떤 그림을 그릴지 정말 많은 고민을 하고 나왔다. 진짜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나만의 그림.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작품에 재미와 진심을 갖게 되었는데, 대학 교수들은 내 그림을 장난취급하기 시작했다. 학비가 아깝다느니, 너는 평생 훌륭한 사람이 없을거라느니 악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학 졸업의 막바지에 접어든 4학년 시기는 참 인생의 중요한 시기라고 하지만, 교수들의 악담과 나를 괴롭게 했던 열등감들은 이내 다시 수면위로 떠올라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혹자들은 내가 술을 참 좋아하고, 돈이 많아서 술을 먹었다고 했지만.. 술 먹는거 외에는 딱히 잘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나에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있는 동기자체가 아예 없는 상황이었다.
참 바보같은게, 그런 마음 먹었을 때 그냥 천안을 떠났으면 됐는데, 미래에 대한 아무 준비가 없었던 터라 쉽사리 떠날 수도 없어 대학원을 가게 되었다. 그나마 전액 장학금 조교를 하면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근데 대학원은 조금 다를거라고 생각했던게 바보였던 것 같다. 같은 교수와 같은 환경은 결코 다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천안을 떠났다. 과의 교수들이 ‘희대의 배신자’라고 낙인을 찍었어도, 내 미래를 위해 다 내려놓고 떠났다. 서울로. 처음 접하는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 속으로.
그러나 그것도 참 녹록치 않았다. 극한의 외로움과 쓸쓸함, 부족한 나에대한 자괴감이 지독하게 나를 괴롭혀 지금 집 화장실 만한 단칸방에서 술먹는 것으로 그 시간을 버텨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그럼 그걸 버텨내려면 작품을 많이 만드는 수 밖에.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보상을 받은걸까. 그렇게 무시당하고 욕먹던 나의 작품들이 막상 활동한 뒤로 크게 작품을 판매한 적은 없어도, 적잖은 기회들을 얻었다. 참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인생이. 잘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2020년 한 해 믿었던 사람에게 2015년 이후로 또 한번 배신을 당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코로나까지 터지면서 멘탈과, 활동과 모든 것이 올 스탑되었다. 그간 갖고 있던 안정감이 모두 깨지고, 사회적으로 말도안되는 부동산 폭등과 비정상적인 시민단체와 집요하게 연결된 현 정권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고, 6개월간 비대면 교육으로 방구석에서 매일같이 컴퓨터 앞에 앉아 강의를 듣고, 마침내 취업을 했다.
사실 최소 10년만 쉬자는 생각으로 내려놨다. 하지만 혹자는 ‘아깝다’, ‘그래도 하는게 낫지 않냐’ 하지만 그들이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특히 나는 ‘내 꿈을 위해 달려가’, ‘남들이 뭐라하든 상관 없어’는 모두 잘된 사람들의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내 꿈을 위해 달려갈 수 있는 것도, 내 스스로에 대한 어빌리티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남들이 뭐라하든 상관 없는건 사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가끔 현실적인 조언들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왜냐면 내가 가끔 틀린 방향으로 가는지 내 스스로조차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데 재밌는건 다들 내가 작품활동을 하지 않고 쉰다거나 혹은 그만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활동중인건 아무도 모른다. 고주안도 아니고, 혼자도 아니고, 기존의 방법도 아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활동중이다. 결국 어떤 특정 시점에 결과가 지금의 노력을 증명하리라 생각한다.
고로 나는 ‘그럼에도 작업을 계속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