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밀도에 대한 단상
나를 감싸고 있는 쓰레기들
처음 서울에 올라와 원룸에서 자취를 시작했을즈음, 내 짐이라곤 컴퓨터 1세트, 옷, 신발, 생필품, 간단한 주방용품 정도였다. 8년이 흐른 지금 방이 세개나 되는 빌라에 가득찬 짐들을 어떻게 비울지 고민중이다.
막상 버릴려고 해도 보면 다 쓸모가 있다. 언젠가 꼭 필요한 것들.. 특히 공구들이나, 생필품들이 그렇다. 그 많은 짐 치고는 옷가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전자제품, 피규어, 음반..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간 내 욕심들이다.
당근마켓을 전전 긍긍하며 저렴하게 구입한 전자제품들과 중고로 열심히 모은 음반&책 등. 이제는 그 양도 제법 많아서 쉽사리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대다수의 많은 이들이 어떤 물건에 집착하는 이유는 각자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만화책’과 ‘피규어’, ‘음반’을 모으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어릴적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다.
결핍이라고 해야할까.
태어난 후 이사만 수십차례 다니면서 늘 ‘내 것’ 혹은 무엇을 추억할만한 ‘나의 공간’이 없었던 것은 나이를 먹으며 점점 그 시절을 ‘재현’하거나, 그 시절의 감정을 온전히 꺼내볼 수 있는 ‘어떠한 공간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그 음악을 들고 그 만화를 보며 오롯이 그 시절 내가 행복했던 순간들을 그나마 마주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급변하는 시대, 그리고 그 시대속에서 급변하는 계급의 이동은 나를 초라하게 만들고, 이는 어떠한 물질적인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나를 위해서 해왔던 물질적 투자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 하는 후회가 된다던지. 조금만 더 일찍 세상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 작품활동을 더욱 천천히 독기를 품지 않고 했겠지 따위의 생각들.
그러다보니 많은 물건들이 나를 감싸고 있어도
이 허무함과 허망함,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다.
고등학교 미대 입시를 준비하면서, 모두가 똑같은 석고상을 수채화로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대학의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더욱 나은’ 특이점을 가진 그림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리하여 배우게 되었던 ‘가짜밀도’는 이미 얼추 보기에도 완성된 그림의 무게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미세한 터치와 물맛을 미칠듯이 추가하여 더 열심히, 더 많이 그려보이게 만드는 하나의 전략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면 쪼개기’같은.
말그대로 ‘가짜밀도’였다. 큰 의미도 없는 붓질. 어떤 형체를 보고 그 면들을 완벽하게 파악해서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더 많이’, ‘더 열심히’ 뿐이었던 그 가짜밀도는 알게모르게 나의 그림 습성에 베여있음을 깨다는것은 생각보다 오래걸렸다.
혹자는 내 그림들이 ‘숨막힌다’ ‘답답하다’ ‘여백이 없다’라고 한다.
사실 누구보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있다. 나는 ‘가짜밀도’가 어떤 작품의 완성의 척도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 비유기적인 작업 스타일,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무의미한 터치들이 바로 내가 믿는 어떤 ‘완성’의 단계를 가기 위한 나의 노력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나면 허무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계속 아쉽고, 아깝고, 그럼에도 뭔가 해소의 작용을 한다. 스트레스는 분명 풀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작품에 꼭 어떤 스토리를 요구한다. 그럼 나는 이 작품을 포장하기 위해 또 그럴듯한 말을 해야함에 답답함을 느낀다.
마치 물건들만 빽빽히 쌓아놓는 나의 삶과 너무나 닮아있다. 버리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그러한 모습은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분명 작품 안에 들어간 요소들에는 제각각의 이유는 존재한다. 그러나 큰 맥락에서 나는 결국 한 작품을 위한 나만의 ‘가짜밀도’를 끊임없이 생산중인 것은 아닐까. 그것이 어떠한 결과가 되든, 나는 그저 더 많이, 더 열심히밖에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