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 그름을 떠나 무언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삶. 그 모호한 기준과 갈등 속에 관심을 갖고 있다. 역사적 사실의 다른 해석들과 그 해석의 결과를 믿는 사람들. 친일 친북 친중 등 무언가 ‘나의 선택’이 내 삶에 완전한 기준이 되면 ‘실제의 진실은 외면’하기도 하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 켠이 아리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가장의 역할’을 해야만 했던 시대. 그 시대에서 나의 환경은 조금은 달랐다.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어느정도 크고나서 알게 되었지만, 어릴때의 나에게 ‘가장의 부재’는 너무나 거대하고 위험했으며,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늘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나에게 어떤 ‘소속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곳은 없었고, 늘 이도저도 아닌 상태의 불안한 감정에 휩쓸려 살아왔다.
그러한 영향인지 종교와 정치, 이념분쟁에 매우 회의적이고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삶 속에 ‘같은 카테고리로 뭉친 집단’을 ‘선택하는 이’들의 자유가 있는 만큼 ‘선택하지 않는 이’의 자유도 존재한다. 하지만 소속감이 강한 사람들은 늘 자신과 ‘다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조롱’하며, ‘이성적 논리’에 근거하지 않는 감정적인 언행으로 대화를 차단한다.
이도 저도 아닌 불안함, 무언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 속에서 나는 언젠가부터 작품에서 ‘나눈다’는 것보다는 ‘최선의 타협점’을 찾기 시작했다. ‘자음과 색의 관계, 색과 형태의 관계, 형태와 캔버스의 관계, 프레임과 논 프레임에 대한 고찰, 평면과 관객의 사이 등’ 자음의 형태를 가지고 있던 시각적 요소는 차츰 면, 색, 페인팅 기법등을 통해 다채롭게 바뀌었다.
‘선형대수학’에서 내적이 주어진 벡터공간을 일컫는 ‘내적공간(Inner product space)’이라 하는데, ‘>, <, X’ 기호는 수학에서 ‘내적’을 나타낼 떄 쓰이는 기호들이다. 수학에서 내적의 가장 큰 역할은 ‘추상적인 벡터공간’에서 정의되었던 벡터들의 ‘각, 거리, 도형 등’의 방정식을 건설하는데 중심이 된다는 점으로, 마치 내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기호와 도형들의 생성과정과 유사함을 느꼈고 더욱 적극적으로 위와 같은 기호(Symbol)들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내 작품에 표현된 여러 기호(Symbol), 형태(Form), 색체(Color)는 경험을 기반으로 한 기존에 작업의 모티브가 되어온 ‘가짜밀도(Fake density)’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고, 캔버스라는 평면에 오롯이 나를 위한 ‘내적 세계(Inner world)’에서 ‘내적공간(Inner product space)’의 기호들이 상호작용 하듯, 여러가지의 시각적 요소들끼리 서로 보완하고 의지해 나아가며 캔버스 안에서 ‘현존재(Dasein)’하게 된다.
작업과정의 변화는 기존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은’ 나의 습성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속에 사고에 깊이 관여하여 ‘나도 아니고, 오롯이 작품 자체도 아닌’ 모호한 경계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나’로써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