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올린 것들의 의미: 기호와 가짜밀도

나는 ‘가짜밀도’에 대해 오래전부터 고민해왔다. 필요 이상으로 쌓인 것들이 우리의 공간과 정신을 점유하고, 결국 공허함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예전에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새로운 의문을 품게 되었다. ‘단순히 물리적 축적을 넘어, 우리는 기호를 쌓아가며 또 다른 형태의 가짜밀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가짜밀도를 다시 들여다보고자 한다.

나는 어느 날, 문득 내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책장에는 펼쳐보지도 않은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고, 먼지 쌓인 CD와 피규어들이 장식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책상 한편에는 최신 전자기기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고, 필요 없는 물건들로 가득한 공간은 내 숨을 조여오는 듯했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취향’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 물건들은 과연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는가? 오히려 이들이 내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나는 ‘가짜밀도(fake-density)’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나는 가짜밀도를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들이 우리 삶을 가득 채우면서도, 정작 내면을 더욱 공허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상태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자아를 증명하려 한다. 더 많은 책을 쌓고, 피규어를 늘어놓고, 최신 전자기기를 손에 쥐면서 우리가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물건들은 단순한 소유로 변질되고, 애초에 그것들을 원했던 이유조차 희미해진다. 결국 우리는 물건을 통해 자신을 구축하려 했으나, 오히려 그 무게에 눌려 흐려진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가짜밀도를 작품의 중심에 두고 탐구하고자 한다.

기호 소비와 가짜밀도의 형성 – 장 보드리야르의 분석과 확장 | 나는 가짜밀도가 단순한 소비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소비의 사회(The Consumer Society) 에서 우리가 물건을 소비하는 이유가 단순한 필요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기호(Sign)’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물건의 기능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사회적 가치, 즉 부, 권력, 지위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개념이 가짜밀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CD를 구매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듣기보다는 ‘나는 음악을 아끼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소유한다. 피규어나 전자기기도 마찬가지다. 나의 공간에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곧 나를 증명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실상은 그 물건들로 인해 내 공간과 내 자아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결국, 가짜밀도는 기호 소비의 부산물이며, 보드리야르가 말한 ‘하이퍼리얼리티’와도 맞닿아 있다. 실체 없는 이미지들이 현실을 대체하는 것처럼, 가짜밀도는 나를 구성하는 요소인 척하며 오히려 나를 희미하게 만든다.

기호와 기호의 관계: 선형대수학적 접근을 통한 시각적 밀도의 구축 | 내 작업에서 기호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나는 O, +, >, <, X, ^, – 등의 기호들을 활용하여 이미지의 일부로서 배치하고, 동시에 그것들이 다른 색과 면, 점과 연결되면서 하나의 작품 속 밀도를 형성한다고 본다. 이 기호들은 각각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면서도, 서로 결합되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기호 소비가 사회적으로 의미를 구축하는 과정이라면, 나의 기호들은 시각적 밀도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나는 보드리야르의 이론이 단순히 기호를 소비하는 행위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기호가 현실을 대체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라고 본다. 현실에서 기호는 의미를 지시하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기호 자체가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현실보다 더 강력한 ‘가짜 현실’을 구축해나간다. 나의 작업에서 기호는 단순히 형태적 요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색과 면을 연결하며 하나의 체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보드리야르가 설명한 기호의 자기참조성(self-referentiality)처럼, 내 작품 속 기호들은 서로를 지시하면서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기호 간의 관계를 더욱 심화하기 위해 나는 선형대수학(Linear Algebra)적 구조를 활용한다. 선형대수학은 벡터 공간과 행렬을 통해 수많은 요소들의 관계를 정의하는 학문이다. 나의 작품 속에서 기호들은 단순히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색과 도형, 면과 공간을 연결하는 수학적 연결점이 된다. 마치 수학에서 두 개의 벡터가 선형 결합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형성하듯, 나의 작업 속 기호들은 서로 다른 요소들을 매개하며 전체적인 구조를 만들어간다.

나는 작품 속에서 기하학적 요소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관계를 형성하는지 탐구한다. 이를 통해 나는 가짜밀도를 단순한 물질적 개념이 아니라, 수학적 구조 속에서의 관계로 전환하려 한다. 나는 물건들이 나를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지도록 유도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만약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개념적 오류가 있다면, 이에 대한 수학적 조언을 듣고 보완해 나가고 싶다.

고주안 ‘삶의 지속성’, 53×45.5cm, 2023, 캔버스에 아크릴, 페인트, 유화

가짜밀도 속에서 관계를 구축하는 예술 | 나는 작품을 통해 가짜밀도를 마주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내 작업은 단순한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소비 자체에 대한 태도를 다시 정의하고, 수학적 질서와 시각적 연결성을 구축하는 것에 집중한다. 나는 ‘이것은 정말로 필요한 것인가?’, ‘이것이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이 공간 속에서 진정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우리가 ‘밀도’가 많아야 안정감을 느낀다고 착각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채우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가짜밀도를 탐구하는 과정은 단순한 물건의 축적과 비움을 넘어, 그 속에서 관계와 질서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나는 작품을 통해 이 여정을 시각화하고, 관객에게 가짜밀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